띠아모(ti amo)

로맨스띠아모(ti amo)

이정숙(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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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부로부터 유린을 당하던 재희에게 탈출구가 되어준 서준의 집. 가녀린 몸으로 이모부를 견뎌냈을 재희에게 어떤 희망도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서준의 미소는 욕심내고 싶은 한가지였다. 즐겁기만 슬기와 서준과의 생활에서도 자신을 괴롭히는 이모부를 밀어내지 못하던 재희는 그만 서준에게 둘의 이야기를 알리게 된다. 어리기만 한 그녀의 고통이 자신에게 전해짐을 아는 서준는 그 감정을 애써 부인해 보는데... - 본문 중에서 창을 통해 보이는 어두운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재희는 책을 쭈욱 늘어놓은 채 바쁘게 볼펜을 굴렸다. 마침내 그녀는 볼펜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몸을 쭉 늘이며 시계를 쳐다보니 벌써 새벽 3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재희는 얼른 책을 챙겨 들어 기억해놓은 자리로 다시 꽂았다. 공간이 비어 옆으로 쓰러져 있는 책을 바로 세우던 그녀의 눈에 다른 것들보다 좀 작은 사이즈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재희는 문득 그 책에 손을 뻗쳤다. 그것은 책이 아닌듯했다. 제목도 아무것도 없는 겉 표지를 천천히 넘기던 재희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미니앨범이었다. 앨범 전체를 가득 차지하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재희의 손에서 앨범이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잠시 충격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떨리는 손으로 앨범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녀가 놀란 이유는 바로 사진들의 이상한 모습이었다. 사진들이 하나같이 다 찢겨져 있었던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갈가리 찢어놓기라도 한 듯 조각조각 난 사진들이 다시금 누군가에 의해 한 조각씩 정성 들여 맞춰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모자이크 같았다. 척 보기에도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은 그렇게 모질게 찢겨져 나갔다가 다시금 그 자리에 정성 들여 꿰어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나 작은 조각을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다시 맞추어 놓았다니……. 그러나 재희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알 수 있었다. 이 사진을 찢은 사람, 그리고 다시 맞춘 사람이 한 사람일 것이라는 것을……. 그 사람이 누구란 것도……. 그렇게 앨범을 가득 채운 많은 사진들이 잔인하게 조각조각 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매장마다 한 장씩 꽂혀져 있었다. 어떤 슬픔으로, 어떤 괴로움으로 그 사진들을 그렇게 찢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금 맞추어진 그 사진들은 재희의 가슴을 순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일순간의 분노로 조각났을 사진들이 그렇게나 정성 들여 다시금 메워져 있는 광경에 재희는 넋을 잃고 말았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멈추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외쳤지만 손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책장을 넘기던 그녀의 손이 장문의 글이 씌어진 페이지에 멈췄다. [당신을 죽이고 싶도록 경멸하지만 그만큼 당신을 죽이고 싶도록 사랑해.] 재희는 순간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멈췄다. 그 처절한 어감에 잠시 넋이 나가있는 찰나 갑자기 서재 문이 열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낮은 비명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에서 앨범이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놀란 눈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보니 다행히도 슬기가 눈을 비비며 부신 눈을 가리고 서 있었다. “슬기야…….” 재희는 손이고 등이고 온 몸에 식은땀이 맺혔다.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심장이 두근반 세근반 뛰었다. 재희는 얼른 앨범을 들어올려 제 자리에 꽂고는 슬기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안자구 뭐하니.” “언니. 나 화장실 갈려구 깼다가 서재에 불이 켜져 있어서 아빠가 온 줄 알았어. 아빠 왔어?” 귀여운 피에로 잠옷을 입은 슬기가 재희에게 물었다. “아니. 아빤 오늘 안 오실 거야. 얼른 가서 자자. 언니가 재워줄게.” “언니는 여기서 뭐해?” “응. 책 좀 읽고 있었어. 자 가자. 아 잠깐만. 언니 책 좀 꽂구.” 재희는 얼른 나머지 책들을 제 자리로 꽂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책의 위치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슬기가 하품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기에 마음이 급했던 재희는 되는대로 책을 꽂고는 허둥지둥 레포트와 볼펜을 들고서 서재를 빠져 나왔다. 문을 닫는 재희의 눈이 여전히 그 미니앨범으로 향했다. 마지막 순간에 들어왔던 그 글귀가 재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죽이고 싶도록 경멸하지만 죽이고 싶도록 사랑해. 누구? 슬기 엄마일까? 당연히 그렇겠지? 그 글을 쓴 사람도…… 사진을 찢어버렸다가 그대로 모두 붙여놓은 사람도 당연히 교수님이시겠지? 도대체 무슨 사연일까. 그 분이 그렇게 어두워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녀 때문일까?’ 재희는 자꾸만 드는 생각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어. 이제 그 분이 돌아오면 난 이 집을 떠날 텐데. 잠시 머무르게 해 준 분이라고 해도 더 이상 인연은 없을 거야. 생각할 필요가 없어.’ 그러나 찢겨진 사진들과 그 참담하면서도 강렬한 글귀가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재희였다. 그녀가 나간 서재의 테이블 아래로 쓰다가 찢어버린 레포트 조각이 뒹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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