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디센트(Descent)

잼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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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좋아하나 봅니다.” 그런 꿈을 꿨다.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꿈. 눈꺼풀을 구기듯 감았다. 푸르렀다가, 붉었다가, 희었다가. 눈꺼풀 속에 떠오르는 색색의 얼룩 사이로 언뜻 별의 자취 같은 것이 일렁거렸다. 저도 모르게 그는 뜨겁고 메마른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그걸 보려고 했다. “키에란.” 그러나 남자가 그를 불렀다. 그래서 키에란은 눈을 떴다. 물에 던져 넣은 설탕처럼, 빛에 닿은 별이 마저 녹아 사라지고 말 것을 알아도. 오히려 전부 녹아 사라지고 말 것을 바라며. ‘아무래도 제가, 당신을…… 좋아하나 봅니다.’ 다만 바닥에 남은 찌꺼기처럼, 한마디 말만은 남아서. 키에란은 하늘을 보았다. 흰 달마저 사라진 하늘은 눈부시게 밝았다. 다시, 키에란은 남자를 보았다. “……아일리스.” 남자는 별이었다. 신성 제국 레벤탈리스가 사랑하는 별. 만인이 동경하고, 욕망하여, 손을 뻗게 하는. 신성 제국 기사단 ‘빛나는 신의 손’의 부기사단장. 황자 아일리스. 그러나 별은 별. 떨어지는 별조차도 사람의 손에는 잡히지 않는다. * * * 대륙을 멸망에서 구원한 영웅. 검은 구세사 키에란. 신성기사단의 총기사단장이기도 한 어리숙한 청년은 별, 황자 아일리스를 사랑한다. 그러나 연애를 유희로 즐기는 아일리스에게 애인이란 잠깐 놀고 곧장 치울 한낱 완구일 뿐. 그런 대상으로 여겨지느니, 아예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게 낫다. 그렇기에 지금의 거리에 키에란은 안주해 왔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키에란을 대하는 아일리스의 태도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한결 감미롭고 또 위태롭게. 이 일련의 언동이 정말 고작 변덕이고 유희일까, 아니면. 키에란이 혼란해하는 사이, 둘을 둘러싼 사방의 상황은 점점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 * * “여기까지라.” 목소리는 낮았다. 술에 취해 달아 있던 머리와 몸에 닿기에는, 오싹하게 느껴지리만치. 움칫 목을 떨고 키에란은 아일리스를 올려다보았다. “매번 그렇게 말씀하시는군요. 여기까지. 여기까지라…….” 남자의 웃는 얼굴은, 연회장에서의 그것과는 퍽 다른 얼굴이었다. 어느 한 틈 비는 곳 없이 우울이며 초조 따위가 새겨진 얼굴. 그새 여유가 다한 것처럼. 어쩌면 본래 여유롭지도 않았던 것처럼. “정말 여기까지로 만족하십니까.” 키에란은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가 손을 놓았다. 말뚝에서 풀려난 배처럼, 떠밀려가듯 키에란은 걸음을 떼었다. 휘청휘청. 한 걸음 뗄 때마다 발이 무거워졌다. 다섯 걸음도 못 나아가고 제자리걸음만 하던 그는 결국 발을 멈추었다. 술에 흠뻑 젖은 사고가, 감정이 아래로 또 아래로 가라앉았다. “왜.” “…….” “왜 나한테 이래…….” 말꼬리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나는, 나는…… 여기까지면 됐는데. 늘…… 그랬는데.” 세련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우둔해지고 싶지도 않다. 이 거리면 됐다. 혼자 마음을 품고 혼자 지울 거리면. 그런데 자꾸 이러면. 이러다 기어이 망가지면 그때는, 나는 어떡하라고. 자박. 발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손이 어깨를 붙들었다. 키에란이 돌아보려는 순간 아일리스가 그를 끌어당겼다. 다리가 기울고 몸이 무너졌다. 펼쳐졌던 망토가 가라앉았을 때는 이미 남자의 품 안이었다. 난폭하게 짓눌러 대는 손길에 고개를 내흔든 순간 향기가 코를 파고들었다. 묵직하고 서늘한, 그러나 달콤한 향기. “키에란.” 남자가 이름을 불렀다. 늘 그러하듯이, 그저 상냥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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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밀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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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황후, 궐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