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그렇게 웃지만 말고

엘노키

1,013

힘없는 사람들이 모래알처럼 모여드는 청계천 판자촌. 그곳에 사는 석영의 앞에 어느 날 대학생 우경윤이 나타난다. 그는 코흘리개 시절 석영이 우러러보던 짝사랑 형이자, 간절했던 입양을 약속해주었던 은인, 그리고 고작 미안하게 됐다는 말로 사람을 손쉽게 버리고 떠났던 무정한 남자이다. “야학 선생으로 저는 어떠세요? 제가 잘 가르쳐드릴게요.” 허무하게 이름도 얼굴도 다 잊어놓곤, 예전 버릇 그대로 봉사하듯 호의를 베풀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우경윤. 그런 경윤이 아니꼽고 원망스럽지만, 아직도 그를 보면 석영은 심장이 울렁거린다. “석영 씨, 그렇게 말하면 저 섭섭해요.” 한편,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낯가림 없어 보이던 우경윤은 언젠가부터 석영에게만은 은근한 집착을 드러내는데……. “다른 일 뭐요? 내가 모르는 석영 씨의 일이 있어요? 그러면 곤란한데……. 이제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는 걸로 했잖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나한테 얘기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내가 모르는 일정이 있을 수 있지?” 9년 전, 경윤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짝사랑하는 그를 애써 외면하고 체념하는 석영. 그런 석영의 몸과 마음을 얻기 위해 다정함과 집착, 통제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경윤. 그들이 오해와 시련, 해묵은 상처를 뛰어넘어 결국 서로에게 치유 받는, 애틋한 70년대 순정 이야기. * * * “형은, 우리가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는 일 년이나 넘으면 용하다고 봐요.” 석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제가 줄곧 생각해 왔던 답을 말했다. ”우리는 9년 전에 이미 끝난 거예요. 저는……, 저는 형 못 믿어요.” 허리 뒤로 개미 떼가 지나가는 듯했다. 오소소. 석영은 불현듯 제가 경윤의 어떤 역린을 건드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형…….” “결국 더 옭아매 달란 거잖아. 그치?” 격한 흥분으로 시뻘게진 얼굴 중에 유독 흰자위가 파랄 정도로 하얬다. 그 생생한 눈이 반쯤 접힌 채 키득거렸다. “그래요, 석영 씨.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내가 원하던 거고……. 이젠 무를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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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명적인 끌림
2 입술로 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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