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허기

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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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나타난 것은 사채업자들이 다녀가고 난 며칠 뒤였다. 빚을 못 갚으면 내장이 발릴 때까지 쫓아다닌다더니, 내 공간을 멋대로 점유한 남자는 스스럼없이 행동했다. “똑같네. 복사기로 뽑아낸 것처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수상하고 위험해 보이는 남자를 날카롭게 노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걱정 마. 너 어차피 그 돈 못 갚아. 그러니 입이나 벌려.” 저 때문에 불편해서 씻지도 먹지도 못한 것이 재미있었는지, 남자는 내게 먹을 것까지 건네 오며 웃었다. 며칠 시달린 탓에 피로와 허기가 동시에 몰려왔다. “그쪽도 좀 먹어.” “나는 다른 거 먹을 거야. 남자랑 자 본 적 있어?” 남자는 거침없이 제 욕망을 드러냈다. 도저히 이런 말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 미소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해 보였다. “예뻐서. 네가 너무 예뻐서.” 남자가 열기에 찬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장마철 습기로 가득한 방 안의 온도가 삽시간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평생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헛헛함으로 가득 찬 스물세 살의 여름. 장마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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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명적인 끌림
2 입술로 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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