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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빠담 빠담 빠담

아일라(A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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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고 도도한 겉모습 속에 유약함을 감춘 여자 송혜주.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열망하는 건 해묵은 짝사랑 상대, 친오빠의 절친인 재희였다. 여지를 주면서도 밀어내는 그의 애매모호한 태도에 어장에 낚인 물고기처럼 재희의 곁을 맴돌기를 10여 년. 그렇게 쳇바퀴 굴러가듯 똑같던 혜주의 일상에 건우라는 남자가 나타나면서부터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날 이용해.” “무슨 말이에요?” “그 지긋지긋한 짝사랑을 끝내기 위해 날 이용하라고. 나를 통해 그 시간들을 지워.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나한테서 배워. 사랑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잊었다면 내가 알려 줄게.” 연약한 본모습을 숨기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운 여자와 어쩐지 뾰족뾰족한 그녀가 신경 쓰이는 남자. 그들이 그리는 달콤 쌉싸래한 사랑 이야기. [본문 중에서] “내가 못할 것 같아서 그래?” 혜주의 시선이 건우에게 와서 부딪힌다. 자신만큼이나 복잡하고 방황하는 시선이었다. “너 역시 그 긴 터널을 빠져나오고 싶은 거 아니야? 못 미더운 친구의 전 남자친구한테까지 의지한 걸 보면 너 역시 이 지겨운 짓을 그만두고 싶은 거잖아.” 자신의 말에 아무 대답도 없는 혜주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그 날과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날과 같은 이유는 아니겠지만 분명 지금 그녀는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날 이용하라고. 그깟 케케묵은 짝사랑 따윈 다 잊게 해줄 테니까.” “케케묵었다고 표현하다니, 저한테 너무 무례하신 거 아니에요?” 혜주는 겨우 입을 열어 건우의 말을 받아쳤다. 생각 같아선 맘대로 판단하라고 입을 꾹 다물고 싶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들과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그녀 안에서 부딪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오래 묵은 장은 맛이라도 있지, 고이 간직해 봤자 이루지도 못할 일방적인 짝사랑이 무슨 자랑이라고” 혜주는 상처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무 살 시절부터 그녀를 지배해 온 사랑을 흉측하게 구겨 버린 휴지 조각처럼 취급하는 건우의 말에 혜주는 자존심이 상해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는 덤덤했다. 케케묵어 써먹지도 못할 짝사랑이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되어도 어쩐지 반쯤은 포기하는 심정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제멋대로 구는 그녀라고 해도 혜주는 언제나 진실에 약했다. 그리고 방금 건우는 참 간단하게도 그 진실을 그녀에게 왈칵 뒤집어씌운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을 거란 생각은 안 하시나요?” “응, 안 해.” 가슴 안에 모아 둔 한숨을 뱉어 내고 싶어졌다. 혜주는 자신의 가슴을 누르는 이 기묘한 기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넓은 마음을 가진 남자라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지 미리 묻기라도 하는 거야.” “자화자찬은 오늘도 안 빠지는군요.” “기다려 줄 수 있어. 네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건우는 가늘게 떨리고 있는 아슬아슬한 내 사랑 위에 성급히 손가락을 갖다 대고 있었다. 난 과연 어디까지 박건우를 허용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내가 인내심이 바다처럼 넓은 남자도 아니니 결국 나한테 올 거라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 “막무가내로 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도 정리해. 누군지, 얼마나 됐는지, 얼마만큼 좋아하는지 나는 아무 관심도 없고 상관도 없으니 오늘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정리 시작해. 그리고 정리해서 깨끗해진 그 자리에 날 채워.” 혜주는 놀란 눈으로 건우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오늘 밤 건우는 한참이나 다른 사람처럼 굴고 있었고 그런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혜주는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그녀에게 지독히도 낯설었다. “그 대신 이거 하나만 약속해 줘. 그렇게 날 이용하다가 진심으로 내가 좋아지게 되면 그땐 내게 꼭 알려 줘. 그럼 불필요한 오해도 하지 않을 테고 네 마음을 자꾸 확인하려 드는 바보 같은 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자신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 같은 건우의 말에 혜주는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박건우는 너무 쉽사리 내가 정해 놓은 선을 넘을 모양이다. 그것도 지금 바로 이 순간, 이 자리에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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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명적인 끌림
2 입술로 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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