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꽃과 발톱

정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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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고 있는 산은 고요하고 주변은 적막하다. 홀로 있는 것에 익숙해지고도 남은 어느 겨울, 그는 절벽 아래에서 무언가를 찾아냈다. 상처를 입은 채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작은 소녀를. 목숨만 구해주자고,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만 기다리자고, 계속 그 다음, 그 다음에. 몇 번의 봄이 지나는 동안에도 놓을 수 없었던 여린 손. 혼자가 되자 시간이 어찌 흐르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에게 있어 계절의 변화는 그저 스치는 바람에 불과할 뿐이었고. ‘호운.’ 가늘고 따스한 손가락이 그의 손에 얽힌다. 이 피비린내 나는 꿈속에 어느 사이엔가 그녀가 스며들었다. 어디에 가지 말고 여기에 있으라는 듯이, 빤히 올려다보는 눈동자. ‘호운.’ 잊고 살았던 많은 것들을 되새기게 만드는 목소리. 밀어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밀어내지 못하게 만드는. ‘호운’ 보드랍고 따스한 내 유일한 빛. * 그날부터 송화의 세계에는 오직 호운뿐이었다. 호운은 제게 삶을 주었고, 그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냥 옆에 있게만 해준다면. 상관없다고, 그리 생각했다. 그러니 그가 인간이든, 신이든, 괴물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러니 그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만약에라도 죽게 된다면 호운의 손이 좋았다. 숨이 끊어지는 그 마지막 순간을 그의 손에서 맞이하고 싶었다. ―그러니 이 모든 선택은, 당신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이에요. 호운. * 주의사항: 본도서는 2015년 출간된 <꽃과 발톱>을 재출간한 것으로, 내용의 증감 등 수정된 부분이 다수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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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명적인 끌림
2 입술로 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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