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호 黑虎

로맨스흑호 黑虎

김신형(하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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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이라는 판도라를 열었을 때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 야나 ‘걱정 마. 네 악몽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 콘라드 여기저기서 바이칼에서만 나는 생선인 오믈을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보다 더한 것은 진한 향취를 머금은 바람 냄새. 그의 구둣발이 얼음 위를 톡톡 두드렸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것이 맞나 확인해 보고선 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야나에게 주머니에 있던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그의 체중을 버틸 정도로 얼음은 단단했다. 버스가 지나다닐 정도이니 여기저기서 썰매를 타고 노는 아이들의 웃음도 들렸다. 야나가 저를 향해 내민 그의 손을 무시하고 얼음 위로 올라섰다. “수면이 보였다면 좋았을 텐데.” “아직도 녹으려면 몇 달은 더 있어야 돼요.” “이토록 두꺼운 얼음이 녹기엔 오래 걸리겠지.” 그가 발로 다시 바닥의 얼음을 차며 말했다. 그가 차올린 얼음을 보는 야나의 눈동자가 얼음과 같은 색으로 반질거렸다. 거뭇한 구름 사이로 오랜만에 햇빛 한 줄기가 슬쩍 스며들자 콘라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선글라스를 들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품을 뒤졌다. 결국 텅 빈 손을 여전히 뒤적이며 그는 햇빛이 어서 구름 사이로 사라지길 기다렸다. 습기를 머금은 구름이 빠르게 이동하면서 해를 완전히 다시 가리자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소리들이 흘렀다. 콘라드 외의 모두가 오랜만의 햇빛을 반기고 있었다. 해가 다시 구름 뒤로 들어가자 품을 뒤적이던 콘라드의 손도 멈췄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그렇지?” 그가 자신과 그의 관계를 말하고 있음을 깨달은 야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하룻밤만으로 변하기엔 당신과 난 살아온 세월이 달라요.” “여전히 내게 경계심을 품고 있군.” 해가 사라진 뒤에서야 야나의 눈동자 색이 좀 더 자세히 보였다. 눈동자에 담고 있는 하늘. 그들을 묶고 있는 속박이 풀어진다 해도 결코 그 온전한 색을 볼 수 없을 하늘이 야나의 눈동자 속에 있었다. 잠시나마 그 하늘에 몸을 묻었다. 그의 모든 것을 쏟아 가졌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바람처럼, 모래처럼 부질없지만, 결코 부질없는 짓은 아니었다. “나와의 약속. 없었던 일로 하지.” 그에게 시간이 좀 더 없다는 사실은 다행일까. 그녀가 그를 받아들일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는 것은 다행일까. 다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 한 켠이 싸했다. “그 사이 마음이 또 바뀌셨나요, 리데르?” “그래.” 다행이었다. 이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람에 붉게 얼어붙어 있는 볼을 쓸어보고 싶었다. 주머니 속 주먹을 꽉 쥐며 콘라드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토록 일족의 자유를 바랐으면서 왜 지금 와서 이러는 거죠?” “네게는 더 좋은 일이 아닌가?” 자신에게 안겨오던 작은 몸. 그가 허겁지겁 먹어치웠던 그 입술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죠? 또 뭘 꾸미고 있나요?” 그는 야나의 또 다른 악몽이 되고 싶지 않았다. 미심쩍게 보며 묻는 야나의 눈을 바라보며 콘라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자신의 마음이 들통 날 것 같았다. 이런 여자를 앞에 두고 어떤 말을 해야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지 어느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의 악몽은 하나로 족했다. 그녀로 인해 또다시 누군가 죽었다는 죄책감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라는 악몽을 그녀가 어둠 속에서 불러들이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또 내게 무엇을 요구하려고 이렇게 나오냔 말이에요.” 야나가 한걸음 그에게 다가서자 콘라드가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그의 모습에 야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물러서는 모습을 결코 본 적 없었다. 항상 물러난 쪽은 자신이었다. “약속해. 지금 하는 약속이 진짜야.” 여전히 물러난 채로 콘라드가 강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일족의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말해. 네가 마녀가 된다면 더더욱.” “지금 그게…….” “약속해 줘. 다시는 번복하지 않을게.” 콘라드의 등 뒤로 다시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에서 비쳐 들어오는 강렬한 햇살에 야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역광에 콘라드가 어떤 표정으로 그 말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당신 마음대로 하는 약속에 내 대답이 꼭 필요한가요?” “대답해.” “무슨 변덕인진 모르겠지만 당신 스스로 말한 거예요.” 긍정의 대답을 얻자 콘라드는 야나의 풀어진 신발끈을 보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운동화의 끈을 풀어지지 않게 단단히 다시 조이는 것을 내려다보며 야나는 아직까지 남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 “나의 레지나(regina).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만 들어 야나를 올려다보는 콘라드의 눈이 햇빛에 의해 탁한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 손등에 콘라드가 입을 맞추며 웃었다. 콧잔등과 이마가 잔뜩 찌푸려진 채로 웃고 있었다. 속박을 풀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 따위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위험에 항상 먼저 발을 디뎠고, 그럴 때마다 살아남았다. 그래서 자만한 건지도 몰랐다.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속박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맛본다면 일족들이 마녀들의 그늘에서 벗어나리라 믿었다. 하지만, 눈앞의 그녀, 그를 보는 눈동자 속 푸른 하늘을 죽음의 늪에 던지는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모험을 해왔던 그였음에도, 그녀를 걸고 하는 모험은 그만 두고 싶었다. 그 대가를 알기 때문에. 그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자유를 원하는 일족이 그의 뒤를 이어 나설 것이다. 자신이 없다 해도, 이렇게 일족들을 저버린다 해도, 선대 리데르의 뒤를 이어 자신이 나섰던 것처럼 뒤를 잇는 누군가 나타나리라 믿었다. 그렇게 콘라드는 그녀를 살리고 싶은 스스로를 합리화 시켰다. “레지나?” 처음 듣는 단어에 야나가 되물었다. 악몽을 딛고 스스로 일어선다면 정말 자신의 말대로 ‘레지나’가 될 여자였다. 마치 기사가 예를 표하는 것처럼 콘라드가 다시 한 번 야나의 손등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의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는 그들의 주변으로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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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명적인 끌림
2 입술로 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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