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손가락 걸음 [단행본]

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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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밤, 하준은 거리에서 한 남자를 주웠다. 그의 속눈썹에 빗방울이 맺혔다가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렸고, 힘없이 풀린 팔은 창백하게 희었다. “기억 안 나세요? 길에 쓰러져 있었는데……. 이름이 뭐예요?” “……모르겠어요.” 버려지는 것이 익숙하다는 듯한, 비참하고 우울한 낯으로 남자는 답했다. 왔던 길도, 향하던 방향도, 제가 선 자리도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남자. “가을 씨가 원하면 여기 문하생으로 있어도 돼요.” 하준은 그런 남자에게 새 이름과 있을 자리를 주었다. 가을은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타투이스트 하준에게서 자유의 향기를 맡는다. 일생 억압되어 살아오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 갖고 싶다. 한 조각도 남김없이 모조리. ‘과거’의 나였다면 포기했을 것이지만.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지금’의 내가 원하니까. 가을은 가게 안의 불을 끄고, 하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내가 전에 물었죠, 왜 이렇게 잘해주냐고.” 이제 말해 줄 때도 되었잖아요. 귀를 살짝 핥으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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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명적인 끌림
2 입술로 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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